색색의 영혼으로 모노의 풍경을 창조하는 설박 작가

색색의 영혼으로 모노의 풍경을 창조한다, 설박

설박 작가를 알게 된 건 지인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 하면서였다. 만나기 전부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들었던 터였다. 동양화를 하는 친구로, 인터넷을 통해 그녀의 작품을 보기도 했었고, 지인의 온라인 SNS를 통해 얼굴을 보기도 했었다. 그녀를 픽업하러 가는 길, 작품을 통해 미루어 짐작한 이미지의 여성이 머리 속에 뚜렷했다. 살짝이 어색한 첫 만남이 이루어진 차 안으로 올라탄 그녀의 모습은 나의 추리력을 비웃었다. 손톱에는 각기 다른 원색의 매니큐어가 발려 있었으며, 그녀가 들고 있는 가방에도 화려한 원색과 패턴이 가득했다. 한 눈에 봐도 그녀는 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녀가 어떻게 흑백의 동양화를 그려내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뚜렷한 동양화가로써의 행보를 걷고 있고, 많은 곳에서 인정을 받으며 알려지는 중이다. 현재 ‘송은 아트큐브’에서 하는 개인 전시로 서울에 올라와 있는 설박 작가를 만나보았다.


취재 및 글 : 김남림 / namrim.kim@gmail.com
편집 : Avant-in
작품 제공 : 설박 작가

어렸을 때, 아빠가 동양화를 수집해 집안 여기 저기 걸어두는 게 싫었다. 그 때는 무작정 ‘좀 더 서양틱하고, 컬러풀하면서, 캐릭터가 뚜렷한 그림을 걸어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며 애정을 담아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한 적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내 자신이 그림을 보러 다니고 수집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래 강한 구매욕을 느꼈던 작품 2점이 전부 동양화의 매력을 기본으로 한 작품이었다. 문득 이러한 공통성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예전 인터뷰이였던 분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은 결국 원류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인터뷰 대상인 설박 작가의 작품은 또 다시 나를 자극한다. 먹과 붓이 아닌 ‘먹과 손’으로 태어난 그녀의 한국화 꼴라주는 신선한 오리엔탈리즘을 보여준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처음 그녀의 작품을 인터넷을 통해 봤을 때는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했었다. 동양화를 꼴라주로 풀어놓은 점이 흥미로울 뿐이었다. 이러한 무미건조했던 나의 감상을 바꿔 놓은 것은 2장의 사진이었다. 하나는, 그녀의 그림에 맞춘 멋진 디스플레이와 작품 프리젠테이션의 진수를 보여준 설박 작가의 베이징 개인전 모습이었다. 흔히 농담으로 말하는 ‘대륙의 스케일’은 커다란 화폭에 담은 그녀의 모노톤 풍경을 멋지게 끌어안았다. 광주 비엔날레에 방문했던 중국 ‘T art Center’ 관계자들이 그녀의 작품에 반해 초대한 전시였다. 당시 비엔날레 공연을 위해 초청됐던 중국 악기 연주자 분이 14m폭의 설박 작가의 작품을 당시 구입하기도 했다. 이 연주가가 그 엄청난 사이즈의 그림을 베이징 ‘王鵬 음악홀’에 걸어 놓은 사진이 바로 그 두 번째다. 이 두 장의 사진은 설박 작가의 그림을 하루라도 빨리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불을 지폈다.

실제로 본 그녀의 작품은 꽤나 큰 사이즈를 자랑했다. 무엇보다도 감히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감동의 여부를 왈가왈부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작품들이다. 모든 그림이 그렇지만, 그녀의 작품은 직접 보고 느끼는 감동이 유난히 다르다. 실제 풍경의 일부분이 담겨있는 듯한 크기 덕분에 더욱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근래에 내놓은 것은 대부분 산수화로 전시 타이틀은 ‘어떤 풍경’이다. 특별히 좋은 풍경이 내려다 보이는 산 꼭대기나, 섬 고지대에 가서 직접 보며 그려내는 풍경이 아니다. 화선지에 담묵과 농묵을 먹이고 말라가는 과정에서 흘러내린 먹이 또 다시 스며들며, 특유의 동양적 멋을 만들어낸 종이를 탄생시킨다. 잘 말린 그 종이들은 그녀의 손에서 해체되어, 다시 마음 속 풍경으로 조합되며 재 탄생한다. 몇몇 작품들을 보면서 어렸을 때 가족여행 중에 보았던 잊혀진 풍경들이 되살아 나기까지 했다.

특별한 사진이나 풍경을 보지 않고 이런 작품들을 어떻게 만들어낼까 라는 의문이 들다가도 그녀의 성장 과정을 고려하면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명 문인화가이신 시원 박태후 선생님을 아버지로 둔 그녀는, 우리가 미디어에서 보았던 전라도 나주 ‘죽설헌’에 사는 장본인이다. (‘죽설헌’은 박태후 선생님 부부가 40년 넘게 직접 조경을 하며 가꾸어온 집과 정원으로, 여러 종의 유실수와 과실수, 화초, 대나무 숲이 어우러져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식 정원으로 평가 받아 많은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다.) 일반인들에겐 ‘the 죽설헌’인 곳이, 그녀에겐 ‘그냥 집’인 것이다. 어릴 적부터 집 밖으로 나온 그녀를 둘러싼 자연과 동양 감성이 물씬 베어 있는 풍광을 상상하면, 그녀가 마음으로 풍경을 그려낸다고 해도 수긍이 가는 성장 배경이다. 그렇게 그녀 안에 포개져 간 풍경들이 그녀 마음 한 켠에 누적되어 그녀만의 죽설헌이 있을 것이다. 그 일부분이 그녀의 작품으로 피어오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명 문인화가이자 동종 업계의 대선배이신 아버지의 그늘이 부담되고 싫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그 장점을 감사할 줄 아는 나이가 된 설박 작가다. 그녀의 가족 배경 덕분에 인터뷰에서 흔히 들어왔던 예술계의 입문하게 된 이야기는 그 누구보다 싱거웠다. 집에서 작업을 하시는 아버지, 그 밑에 제자들 그리고 아버지 지인들을 보면서 어린 그녀의 눈에 비췄을 세상이 어땠을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당연히 저도 동양화를 할 거라고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딸이 같은 길을 가는 것에 대해서 좋아하셨구요. 언니도 예술 학교를 다니며 자연히 코스를 밟고 있었고, 저도 언니가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갔어요. 그렇게 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구요. 오히려 그림을 그만두고 싶다고 느낀 건 한국화를 전공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였어요. 그림을 그만두겠다고 집에 폭탄 선언을 하고 방황하다 캐나다로 갔어요. 캐나다에서 보낸 초기 2-3달은 너무나 좋았어요. 웃긴 건 그림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을 6개월도 못 버티겠더라구요.”

그렇게 그녀는 미련 없이 남들의 로망인 캐나다 어학연수를 접어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은 그림을 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린 이상, 다시 시작할 준비가 필요했다. 그녀는 ‘창작 스튜디오’ 입주를 목표로 삼았다.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이 기간에 그녀의 ‘꼴라주 작품’이 탄생했다. 광주 대동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하며 다른 작가들과 교류를 하고 작품활동을 하며, 작가 설박이 즐거움을 느끼는 활동 둥지를 만들었다. 꼴라주 기법의 산수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어느덧 자신의 연작이 되어갔다.

그녀의 작품들을 요리조리 뜯어보면 이런 산수화 안에 꼴라주 방식으로 많은 산들이 연결되어 산맥을 만들어내고, 구비구비 이어진 풍광들이 완성됐다는 것이 신기하다. 무엇보다 이런 크기의 작품들을 거침없이 해낸다는 점도 놀랍다. 특히 (이미 중국으로 가버린) 14미터 폭의 작품은 그 숫자만 들어도 입이 벌어진다. 다 완성된 작품도 작품이지만, 작은 작업실에서 홀로 그 작업을 만들어냈을 작업 과정을 상상하면 그것은 엄청난 도전이다.

“제 장점일지도 모르는데.. 전 별로 겁이 없어요. 그냥 해볼까 하면 앞뒤 생각 안하고 우선 하고 보는 타입이에요. 작품들이 제 키보다 큰 경우도 많아서 (참고로 그녀는 나름 장신이다.) 사다리에 올라가서 하기도 하는데… 이런 걸 하려면 이런 어려움이 있겠지? 라는 생각을 잘 안 하는 거 같아요.”

구구절절한 고생담도 자신을 미화시키는 묘사도 없이 그냥 자신은 그렇다고 얘기해버리고 만다. (문득, 한국에서 가장 폭이 넓은 꼴라주 개인 작품의 크기가 몇일까 궁금해졌다. 잘 하면 한국 기네스 한 구석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을까?) 앞 뒤 상황을 고려하고,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상황의 대처 시나리오까지 생각하는 나란 사람으로선 믿기 힘들만큼 담백한 대답이다.

산과 섬이 굽이굽이 차 있는 그녀의 작품 안에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또 다른 앵글들이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요즘 그녀는 최대한 빼는 여백의 작품을 시도하고 있다. 예전 작품을 보다가 곧 바로 최근 작품을 보게 되면 그 반전의 차이가 너무 커서 보는 사람으로써 배고픔이 느껴질 정도다. 이런 그녀를 보고 있자면 자유분방함은 입으로 떠벌리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베어 나오는 것임을 느낀다. 전통 기법을 중시하는 동양화 세계에서 붓을 쓰지 않는 것부터 그렇다. 화선지를 손으로 찢어 조각조각 내어 ‘붙이고, 덧대고’하는 것 역시 net세상 표현으로 동양화 계에선 ‘청년 작가의 패기’로 묘사할 수 있겠다. 붓으로 문인화를 그리는 아버지를 지켜 보며 성장한 그녀로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더불어 ‘2m 40cm 높이의 작품을 해볼까’ 라고 생각하고, 그게 마음에 들어 복수 연작을 뽑아내는 배포는 앞으로 그녀에게 좋은 엔진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녀의 영혼을 물들인 자연의 색부터 문인화가의 딸로 성장하며 그녀에게 배였을 한국화의 색깔들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색색의 컬러감이 베어있는 그녀의 스타일까지, 누구보다 색으로 물든 설박 작가는 흑과 백을 통해서 그녀 자신을 내보이고 있다. 이런 모순이 설박 작가를 흥미롭게 한다. 현재 삼성동 ‘송은 아트 큐브’에서 그녀의 초대전이 한창이다. 모든 작품을 볼 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되었던 2m 44cm의 연작 시리즈를 멋지게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이다. 전시는 2월까지 볼 수 있다.

전시 안내 : http://www.songeunartspace.org/programs/user/cube/cube_ex_c_ex.asp

설박 개인전: 어떤 풍경
2013. 1. 11- 2. 26
관람시간
월-금요일 9:00am~6:30pm, 주말, 공휴일 휴관 / 무료관람
(2월은 토, 일 개관 13:00-18:00)